가수 앞으로의 계획은 한국 트로트 가요 후진 양성 데뷔 60주년을 맞은 하충화.

영원한 디바 하춘화가수가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았다. 강산이 여섯 번 바뀌는 시간이 흘렀지만 하춘화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가수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 노래에 대한 열정도 여전하다. 열정이 식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게 하춘화의 오랜 소신이다. 그래서 그는 지지 않는 열정으로 노래한다. 영원한 국민의 누님으로 국민의 마음에 남아 있다. 하춘화 가수는 60년 음악의 원동력은 열정이라며 팬들이 원할 때까지 노래한다고 말했다.

하충화는 데뷔 60주년의 감회에 대해 사실 실감이 잘 안 난다고 말했다. 데뷔할 때만 해도 대중예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너무 컸고, 더구나 어린아이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만으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고 옛날 일을 회상했다. 하충화는 그런 시절이었지만 아버지는 자식은 부모의 의지나 욕심으로 키워야 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진 분이었다며 부모의 사랑으로 오늘의 하충화가 있어 빛났다며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때 유일하게 나를 밀어준 분이 아버지였다고 말했다.

하춘화씨는 “2년 전(하정오씨(만 100세) 세상을 떠났지만 앞으로 내 가수 활동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 속에’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국내는 물론 세계 어디를 가나 아버지와 함께 했다”며 “그 하춘화는 아버지 덕분에 가수가 됐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모든 덕분을 아버지의 것으로 돌렸다.

하춘화는 전남 영암 학산에서 태어났지만 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5세 때까지 부산에서 주로 자랐다. 그러다 여섯 살 때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는데 아버지가 동아예술학원에 하충화를 데리고 갔고, 우리 아이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고 작곡가들에게 소개했다. 재능을 인정받은 하충화는 이후 당시 최고의 작곡가였던 현석기 선생(1911~1994)에게 6개월간 교육을 받았고, ‘천재소녀가수 하충화가요앨범’이라는 타이틀로 앨범이 탄생했다. 이때가 1961년이다.

하춘화는 데뷔 60주년을 맞아 가수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기쁜 일과 아쉬운 슬픈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기쁘고 기뻤던 것은 제 노래가 국민들에게는 힘과 용기를 드렸고 슬픔을 달래줬다는 점”이라고 했다. 또 “국민들이 저를 알아줄 때 가수에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또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인 자격으로 평양 방문 및 공연과 하·의 협정문 제로 신라호텔 초청 공연 등으로 주요 신문에 ‘가요외교’라는 제목 기사가 크게 실렸는데 대한민국의 딸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기부의 여왕과 유명한 하춘화는 부모의 교육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어렸을 때 대중예술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을 때 히트곡인 물새 한 마리(당시 16세)가 나왔는데 아버지는 사회로부터 받은 사랑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나눌 수 있는 가수가 되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며 “그래야 대중가수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고 동료, 선후배들에게도 동기부여가 되고 있는 이웃이 될 만큼의 노력을 다했다”고 말하는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춘화는 2016년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노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에 가입했다. 하춘화가 지금까지 공연 수익을 통해 기부한 금액은 2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하춘화는 “다른 가수들은 명절이면 콘서트나 리사이틀을 열었는데 나는 가족과 함께 했다”며 “1년 365일 중 180여 개를 공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하루 다섯 번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고 했다.하춘화는 1981년 8500회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하춘하는 “죽기 전날까지 노래를 부르다가 무대 내려오면 더 좋다”고 했다. “국민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이어서 기사내용을 본다↓↓↓”가수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거의 영암한국의 엔카가요센터가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국민가수, 하춘화가수가 데뷔 60년을 맞아 앞으로의 계획을 밝힌 말이다. 그녀는 1961년 12월 6살 때 가요계에 입문해서 합시다.www.asiac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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