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IAC 1차전에 참가한 KAIST 팀이 환호하는 모습. / IAC 제공 미국 라스베이거스 중심가에서 약 20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스베이거스 모터스피드웨이(LVMS). 7일 낮 12시 30분경 이곳에서 오렌지색 미국 오버룬데 차량이 먼저 트럭을 돌기 시작한 가운데 투입된 파란색 한국과학기술원(KAIST) 차량이 여러 바퀴를 함께 돌기 시작했다. 세 바퀴를 도는 도중 파란 차가 관중 눈앞에서 속도를 내 앞차를 추월하는 데 성공했다. 관중들 사이에서 함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흔한 자동차 경주처럼 이날 열린 자동차 경주는 특별했다. 지금까지 LVMS에서 열린 모든 경기는 사람이 차를 타고 속도를 겨뤘는데, 이 경기는 사람이 아무도 타지 않은 채 코딩으로 작동하는 무인 자율주행차 간 경기, ‘인디 자율주행 챌린지(Indy Autonomous Challenge·IAC)’였다. 지난 5일부터 사흘간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등에서 열린 CES 2022의 마지막 행사다.
지난 7일 IAC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한 밀라노 공대 팀 차량이 2위 뮌헨 공대 팀 차량을 제치고 있는 모습. / IAC 제공 인디 자율주행 챌린지는 각각 개발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로 누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통제력을 잃지 않고 달릴 수 있는지를 겨룬다. 자동차는 모두 주최측이 제공한 같은 것을 사용한다. 레이더와 라이다(루미나 제품)가 각각 3대, 카메라가 5대씩 들어간 자동차다.
주로 미국과 유럽 대학이 참여했다. 이날은 이탈리아 밀라노 공대(PoliMOVE), 독일 뮌헨 공대(TUM), 이탈리아와 아랍에미리트 대학 연합팀(TI 유로 레이싱), 미국 오번대(오토노머스타이거) 등이 출전했다. 아시아에서는 KAIST 팀이 유일하게 도전장을 내고 4위에 오르는 성취를 거뒀다. 심현철 전기전자공학부 교수가 이끄는 이 팀은 대기업 후원을 받는 다른 팀과 달리 자력으로 참여했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술개발 기간과 자금력 부족 등을 감안하면 뜻깊은 성과다.이번 대회는 지난해 10월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모터스피드웨이에서 열린 자율주행 챌린지에서 참가자격을 얻은 팀 간 경쟁이었다. 10월 경기는 두 대 간 경쟁이 아닌 서로 한 번씩 트랙을 돌며 속력을 재 가장 빠른 팀이 이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주최 측은 3개월 만에 열린 2차전에서 규칙을 바꿔 세계 최초로 2대 경쟁(head to headrace)을 시도했다. 2차전에 진출한 팀이 그런 방식을 견딜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우선 한 팀이 출발해 경기장을 돌 때마다 시속 60마일, 80마일 식으로 시간당 20마일(32km) 단위로 속도를 높여 가면 상대 팀도 속도를 함께 올리며 따라붙는 식이다.
시속 100마일(160km)을 넘으면 차량 제어가 쉽지 않기 때문에 상대 차 따라잡기에만 몰두하면 차가 전복되기 쉽다. 차량의 움직임을 잘 조절하면서 상대 차량의 속도 이상을 내는 게 목표다. 단순히 속도만 비교하는 게임이 아닌 이유다. 심 교수는 “기술이 더 발달했다고 판단하면 이후에는 유인 레이싱처럼 서로 상대 차선에 진입해 엎치락뒤치락하는 경기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KAIST 팀을 이끈 심형철 교수 2차전 참가 자격을 얻은 곳은 9팀이었지만 이날 실제 트럭 위에 오른 차량은 5대에 불과했다. 미국 버지니아대 팀은 경기를 앞두고 마지막 훈련 과정에서 차가 손상돼 불참했다. 하와이대 퍼듀대 MIT공대 피츠버그대 등 연합팀 등 3개 팀은 주최 측이 요구한 자격을 행사 전까지 갖추지 못해 트랙에 나가지 못했다.
자율주행차의 속도는 유인 레이싱 못지않게 빨랐다. 브아앙 하는 스피드카 특유의 굉음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본 경기에 앞서 진행된 테스트 과정에서 밀라노공대 ‘폴리무브(PoliMOVE)’ 팀은 최고 시속 170마일(270㎞)을 기록했다. 심 교수는 “사람이 운전할 때는 차량의 상태, 주변 상황 등을 감으로 받아들이고 신속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반면 자율주행차는 모든 상황을 코딩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물론 액셀을 밟으면 차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매우 속도가 빠른 상태에서는 조금만 삐어도 바로 차가 벽에 부딪히거나 뒤집힐 수 있어 균형을 잘 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날 도전은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12시 30분경 첫 경기에 나선 오번데 팀은 세 번째 트랙을 돌 때 KAIST 팀에 추월당한 데 이어 다섯 번째 트랙에서 갑자기 운행을 중단했다. GPS 장치가 불안정하게 움직이면서 경기 중단 상황에 빠진 것이다. 이 때문에 KAIST 팀 차량도 충돌을 막기 위해 서야 했다. 구급차에 실린 환자처럼 견인돼 실려온 두 대의 차량을 보는 관중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1차전에서 KAIST 측의 승리가 선언됐지만 이번에는 2차전에 나갈 예정이던 밀라노 공대 팀 차량에서 라이더에게 문제가 생겨 경기 진행이 중단됐다. 관객석에서는 “테스트 때 170마일에 달하는 높은 속도를 내면서 라이더에게 무리가 간 것 아니냐”는 추측이 오갔다.
라이더 문제를 해결한 밀라노 공대 팀 차량은 125마일까지 속도를 높여갔다. 반면 KAIST팀은 115마일로 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중간에 한 차례 KAIST 팀 차량이 앞서기도 했지만 대부분 밀라노 공대 쪽 차량이 더 빨랐다. 심 교수는 “속도를 무리하게 높이면 차량 안정성이 떨어져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대회 관람차 방문한 지멘스의 한 관계자는 “차량 가격이 100만달러에 달한다”며 “대학 연구팀이 참가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각 팀으로선 이번 대회에서 우승자가 되기보다 사고를 피해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밀라노공대 팀이 우승해 15만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2위는 10월 대회 우승자인 뮌헨공대(총상금 5만달러)가 차지했다.
지난 7일 IAC전에서 라이벌 오반데 차량이 경기를 중단하자 KAIST팀 차량도 경기를 멈추고 관중석 쪽으로 견인돼 실려오는 모습. /IAC 라이브스트림 화면 캡처.한계도 있었다. 통제된 서킷 안을 돌면서도 코딩 한두 줄에 사고가 나는 상황은 아직 유인 자율주행에 이르기까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줬다. 출전 차량의 시뮬레이션을 지원하고 있다는 지멘스 관계자는 “경기 전날 단 한 줄의 코딩 내용을 수정했다가 오타를 내는 바람에 차량이 고장난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날도 오번대 팀의 GPS 문제, 밀라노 공대 팀의 라이더 문제에 이어 이탈리아·아랍에미리트대 연합팀도 차량이 통제력을 잃고 벽으로 튕겨나가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통해 자율주행 기술이 향상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경기를 마친 뒤 심 교수는 “매우 재미있는 경기였다”며 “자율주행으로 고속도로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면 운전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CES를 주최하는 소비자기술협회(CTA) 게리 샤피로 회장은 “자율주행 경기는 기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IAC 경기에 출전한 KAIST팀이 7일 오후 4위에 오른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KAIST 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