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현주 코피 나요!시뻘건 피가 쏟아져 여름날 소나기처럼 책상 위로 쏟아졌다. 조용하던 수업시간, 천둥 같은 단짝의 외침이 우리 교실뿐 아니라 복도 너머에 메아리쳤다.
코를 후비는 것도, 어딘가에 부딪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밤새워 공부한 것도 아닌데 불쑥 튀어나온 이 코피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동무의 손에 쥐어진 휴지로 코를 가리고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혔다. 피가 목구멍으로 콸콸 흘렀다. 따뜻하고 끈적끈적했다. 비릿한 피맛이 고약해서 속이 메스꺼워졌다.
돌돌 말아 코에 깊숙이 밀어넣은 하얀 휴지는 금세 빨개졌다. 바꿔 붙이자 다시 피로 물들었다. 내 코에 구멍이 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뱉을 수 있겠는가.
4학년 5반. 3교시 미술시간, 조용했던 우리 교실은 나의 코피 파동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내게 몰린 친구들 중 가장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사람은 대학 졸업 후 첫 발령을 받은 20대 젊은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세면대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피 묻은 얼굴을 씻어줬지만 흐르는 물과 코피가 섞여 세면대가 피로 가득 찼다. 선생님과 나는 둘 다 몹시 흥분해서 떨고 있었다.
현주야, 안 되겠다. 집에 가서 엄마랑 같이 병원에 가는게 좋을 것 같아.”
잔뜩 겁을 집어먹은 젊은 선생님은 양호실 대신 서둘러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휘청휘청 어지러워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여느 때 같으면 나비처럼 날아왔을 10분 거리의 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습관처럼 엄마라고 불렀다.
“……………..”
알고 있었다. 빈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부모님은 장사하러 나온 걸. 알고 있었다.저녁은 돼야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어머 현주야, 왜 그래? 왜 그래?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빨리 누워서 쉬자. 엄마가 이불 깔아줄게호들갑스럽게 맞아줄 어머니를 기대했던 것 같다.
아무 대답이 없는 텅 빈 곳에 우두커니 서서 아기처럼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코피로 놀라움과 슬픔이 뒤범벅이 됐고 코피보다 더 격렬한 눈물이 흘렀다.
이불을 깔고 누웠다. 천장을 가득 채운 꽃무늬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꽃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기절할 듯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현주야! 현주야! 일어나 봐!'”
누군가가 저 멀리 동굴 밖에서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모기만의 소리는 점점 강아지 소리로, 강아지 소리는 다시 호랑이 소리로 커지고 있었다.
꿈인가? 누군가 있는 것 같지만 흐릿하고 흐리멍텅했다.
눈에 힘을 줘서 또 한 번 깜빡깜빡 눈이, 또 한 번 깜빡깜빡 코가, 또 입이… 점점 선명해졌다. 엄마였다.
“엄마” 또 눈물 흘렸어
현주야, 얼굴이 왜 그래? 옷에 꽃이 피겠느냐.
“학교에서… 코피가 심하게 나서…” 조퇴하고 방금 집에 왔는데…”라고 흐느끼며 말했다.
‘그럼 도대체 몇 시간 잔 거야?’ 어디 아파?”
그때부터였다.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내던지고 고무줄, 서양치기, 도둑잡기, 진돌이 놀이를 하며 동네를 돌아다닌 명랑소녀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되었다. 마녀의 바늘에 손을 찔린 듯 깊은 잠에 빠졌다. 코피도 늘 찾아왔다.
놀이에 적극적이었던 딸이 힘없이 자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가 내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제 목 한가운데가 불룩하게 부풀어오른 걸.
부모는 혹시 둘째 딸이 병이라도 났을까 걱정하면서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서울대병원으로 끌려갔다.
어린아이 같았던 나는 기차를 타고 전철을 타고 서울에 가는 것이 소풍처럼 신기하고 즐거웠다.
처음 마주한 서울대병원 건물은 거대한 괴물 같았다. 나를 삼킬 듯이 위협했다. 첫날 건물의 크기에 압도당한 나는 그 건물 앞에 서면 큰코 다칠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건강했던 나는 병원 앞에 서면 죽을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윤현주 환자, 들어오세요.”
나는 두려움을 느끼며 어머니의 팔 뒤로 내 몸을 반쯤 벌린 채 진찰실로 들어갔다.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 의사가 인자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요즘 애들이 피곤하고 기운이 없어 보여 몸을 관찰했더니 목 중앙 부분이 불룩한 것 같아요. 선생님…
걱정스럽게 엄마가 대답했다.
의사가 천천히 내 목을 살펴 피검사, 소변검사 등 몇 가지 검사를 부탁했다.
‘윤현주 환자분 결과 보러 가세요’
할아버지 선생님은 잠자코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왜 이렇게 힘들어?’
요즘 고민하고 힘든 게 있나.”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자식이 이런 병에 걸렸을까?
선생님, 현주 씨, 어디가 아프세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어머니가 물었다.
“아, 아니에요. 놀라지 마세요. 암처럼 심각한 병은 아니에요. 현주는 ‘갑상선’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40대 이후에 보통 주부에게서 발명되는 병이기 때문에 11세, 4학년 어린이가 걸리는 일은 아주 드물어요. 아이가 요즘 어떤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던가요? 무슨 말 못할 고민이나 걱정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왜 갑상선에 걸렸는지, 저도 처음이기 때문에 매우 당황하고 있습니다.”
11세에”갑상선 기능 저하증”이란, 이름조차 생소했다. 갑상선의 주된 증상은 무기력감과 피로감이었지만, 나의 경우의 치료법은 약물 복용이었다.다행히 수술이 필요한 갑상선은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내원해 피를 뽑고 호르몬 수치를 체크하며 약을 먹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갑상선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모두 찾아 만들어 주셨다. 김과 미역을 특히 좋아한다는 말에 김과 미역은 우리 집의 단골 반찬이 되었다. 병은 소문을 내라더냐? 어머니는 틈만 나면 이웃과 갑상샘 얘기를 했고, 연하라는 병원 소식을 들으면 나를 학교 대신 인천으로 부산에 갑상샘 전문병원으로 데려갔다.
뛰어나다는 소문 속의 병원은 역시 전국에서 몰려든 환자들로 북적였다. 환자 숫자로 보면 기적의 병원임에 틀림없었다. 엄마와 나는 그 병이 금방 나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자리가 나서 겨우 엉덩이를 붙이자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칭칭 땋은 50대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물었다.
아줌마가 갑상샘을 앓은 지 얼마나 됐나요? 여기 병원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죠?”
“아…네…제가 아니라 딸이 갑상선을…”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환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나는 동물원 철장에 갇힌 사막여우가 된 기분이었다. 병원 어디를 둘러봐도 환자 중에 나 같은 어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 찾아다녔지만 어디에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울대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목숨처럼 먹고 소리 없이 질병과 사투를 벌이던 중2 겨울방학이었다.
윤현주 환자, 들어오세요.”
이제 약은 안 먹어도 돼요. ‘완치’ 됐어요. 재발하지 않도록 건강관리에 유의하세요 그동안 수고했다. 현주 학생.
감사합니다!선생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환희의 송가와 대한독립만세가 귓전을 때렸다. 병원에서, 강한 약에서, 해방이었다.
병원을 떠나 서울대병원을 돌아봤다. 괴물 같던 거대한 건물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유니콘처럼 보였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따뜻하게 감싸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를 치료해 줘서 고마워요. 다시는 만나지 말자” 건물과도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임신할 때까지 갑상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기적으로 혈액검사를 하고 임신에 문제가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첫 아이를 기다렸다.
왜소한 체격이라 그 허리로 무슨 아기를 낳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는데 말이 씨가 됐을까? 진짜 아기가 안 생겼어.
절망 속에 기적처럼 찾아온 첫 아이. 유산 위험이 있다는 의사의 말에 좋아하던 일을 당장 그만두었다. 누워서 10개월을 보내고 건강하게 첫딸을 낳은 뒤 나는 보란 듯이 아들 셋을 연달아 풍년을 낳았다.
당신 아이의 출산을 모두 같은 의사가 받아들이고 퇴원하는 날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신가요?다음에 또 만나요.
나의 심술궂은 지인들은, 한번씩 이렇게 이야기한다.현주야 너 다섯째 안 낳니?다섯 번째 도전해야지!넌 아직 할 수 있어
또 잊을 만하면 철없는 막내가 말한다.
엄마, 동생 낳아주세요저도 남동생을 갖고 싶습니다.
다들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공장 문이 굳게 닫혀 있음을 모두에게 알립니다.이 글을 쓰면서 5년 동안 제 병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대신 아파지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건강한 것이 제일 효도인데 전 이미 너무 불효했다구요. 오래 전 하늘나라에 간 아버지 몫까지 친정어머니께 바쳐 효도합니다. 가난하지만 아픈 딸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신 부모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코피를 쏟던 그때 그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사랑 덕분에 네 아이의 어머니!애국자가 되었어요.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현주는 코피가 나요! 시뻘건 피가 쏟아져 여름날 소나기처럼 책상 위로 쏟아졌다. 조용하던 수업시간 동무의 외침은 우리 교실뿐 아니라 복도 너머를 울렸다. 코를 후비는 것도, 어딘가에 부딪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밤새워 공부한 것도 아닌데 불쑥 튀어나온 이 코피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파트너가 손에 쥐어준 휴지로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