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했어… 브레이킹 포인트 (넷플릭스) [영화 리뷰] 할게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추석 연휴에 전 세계를 강타한 넷플릭스의 국내 화제작 오징어 게임을 시청하면서 오랜만에 테니스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못할 얘긴데 이 영화는 로저 페데러와 조코비치, 마리야 샤라포바나 세리나 윌리엄스 얘기가 아니다. 놀랍게도 한때 미국 테니스의 작은 희망이었던 마디 피쉬(Mardy Fish)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다.

앤디 로딕에 이어 잠시 미국 테니스 넘버원 자리에 오른 피시가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넷플릭스는 절묘하다. 미래를 어떻게 예측했는지, 지금 세계 테니스계에 화제가 되고 있는 선수들의 정신 건강을 정면으로 다루는 시의성이 넘치는 스포츠 다큐멘터리를 탄생시켰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디피시의 생애 최고의 도전인 2012년 US오픈 16강 진출을 앞두고 펼쳐진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테니스 경기장인 아서 애쉬 스타디움의 어두운 복도를 걷는 피쉬의 뒷모습, 그 경기장에서 피쉬는 당시 세계 랭킹 1위였으며 (그 당시까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Greatest of all times, 로저 페데러와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는 피시의 현재가 아니라 과거로 향한다. 주니어 시절 유망주였던 피시는 빛 서버 앤디 로딕과 함께 미국 테니스의 미래로 불리는 선수였다. 하지만 선두와는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2위였다. 지미 코너스-맥켄로-샘플러스-아가시로 이어지는 미국 테니스의 ‘월드 넘버원’ 계보는 분명히 앤디 로딕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기대에 로딕은 부응했다. 2003년 US오픈 우승과 세계 1위. 그때만 해도 피시는 동갑내기인 로딕과 주니어 시절부터의 라이벌이었지만 결코 1위를 넘지 못하는 2인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피쉬의 정신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로딕이 로저 페데러라는 피쉬의 다큐멘터리 표현으로는 미국 테니스의 천적인 스위스 테니스 거장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 피쉬의 운명은 비극적 반전을 맞게 된다.

로딕의 침체를 틈타 피시는 무려 13kg이나 감량하는 엄청난 다이어트에 돌입해 미국 내 1인자 자리에 도전하게 된다. 그리고 2011년 피쉬의 땀과 노력은 결실을 맺어 8명의 최고 선수들이 겨루는 런던 파이널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가하는 영광을 안았다.

마디피시의 불행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국 테니스 일인자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벅찬 일이었다.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몸에 이상 신호가 나기 시작했어. 심장 박동 횟수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져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이 경기를 앞두고 반복됐다. 1분간 심장박동수 240회로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는 2012년 US오픈에 복귀한다. 피쉬가 호텔에서 나와 로저 페데러와 대결하기 위해 아서 애쉬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아내에게 절박한 고통을 호소한다.

“난 아무래도 못할 것 같아.” “자기야, 힘들면 하지 마. 그러지 마.”포기? 무슨 소리야 그게… 아… 음…”

피시는 결국 페데러와의 US오픈 16강전에서 기권을 선언하고 말았다. 미국테니스협회(USTA)는 충격에 휩싸였다. 2012년 US오픈은 공교롭게도 앤디 로딕이 30세의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한 무대이기도 했다. 로딕과 피쉬, 두 명의 간판스타를 모두 잃은 미국 테니스는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피쉬의 정신건강은 이후 더 나빠졌고 2012년 남은 대회를 모두 포기하고 치료에 돌입했다. 아동심리학자까지 찾아가 상담한 결과 공식적으로 불안장애 증상이 확인됐다.

하지만 피시가 무엇보다 가장 힘들어했던 부분은 불안장애 증세 자체가 아니었다. 남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즉 남이 자신의 병을 눈치챌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피쉬는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되돌아 본다.

프로 테니스 선수는 상대에게 약점을 숨겨야 하는 게 숙명입니다. 무엇보다 제 약점을 말할 수 없다는 게 가장 괴로웠어요.”

피쉬가 투어 무대에 다시 돌아온 것은 그의 마지막 현역 시절이기도 한 15년이 되어서였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그랜드슬램 대회가 될 운명의 2015년 US오픈. 피쉬는 큰 결정을 내렸다. ‘커밍아웃’ 불안장애라는 자신의 약점을 모두에게 고백하는 ‘정면 돌파’를 결심했던 것이다.

2012년 논의 기권 이후 3년 만에 다시 복귀한 US오픈. 개막을 앞둔 공식 기자회견에서 피쉬는 자신의 정신건강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운동선수가 정신적인 약점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후 피시는 2015년 US 오픈 64강전 펠리치아노 로페즈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세계 랭킹 581위. 그는 33세였다.

아마 2015년 세계 테니스계를 놀라게 한 피쉬의 용감한 기자회견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제작의 시발점이 됐을 것이다. 피쉬의 모습은 아주 새롭고 놀랍고 안타까웠다.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되는 정상급 스포츠 스타가 정신적으로 큰 약점이 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브레이킹 포인트(Breaking point)는 이중적인 의미로 내게 읽힌다. 테니스 용어 브레이크 포인트라는, 실로 아슬아슬한 위험한 순간을 말하는 동시에 심장이 붕괴될 정도로 괴로운(Heart-breaking) 상황을 묘사했을 것이다. 게다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면의 고통이다. 그런 점에서 ‘못다한 얘기’…브레이킹 포인트라는 제목은 절묘하다.

마디피시는 강한 것을 무한히 강요받아야 하는 현대 스포츠 스타들의 내면의 고통에 대해 처음으로 공적인 목소리를 낸 문제의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우리는 테니스라는 스포츠에서 나오미 오사카라는 또 다른 슈퍼스타가 비슷한 고통을 호소하며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게 됐다.

운동선수들의 정신건강, 정신건강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아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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