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좋은 약은 쓴-단맛이 있는 약은 더 좋은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다는 속담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Agood medicine tastesbitter”라고 말하며 영미권에서도 확산되는 속담이기도 합니다. 이 뜻은 또 의학적 영역 밖에 확대하고” 삼키기 어려운 약(bitterpill toswallow)”는 ” 들을 때는 기분 나쁘지만 쓸모가 진실의 충고”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공통된 철학은 결과가 나아지려면 고통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심리학에서 이런 현상에 대해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진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심리 저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에 틀림없어요. 과거에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는 다양한 치료법이 시도됐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하나같이 불필요한 고통을 초래하는 방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상처를 소독하기 위해서는 불에 굽고 사혈(blood-letting)은 거의 만병 통치 약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정맥 주사가 개발되기 전이어서 대신 항문에서 액체를 넣는 치료가 진행되며, 이는 그 뒤, 관장 요법이라는 식으로 유행 하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철야와 단식, 마총은 셔츠를 입고 지내다 새벽 냉수 샤워 등이 권장되었습니다.지금까지 잔혹한 치료법이 아니더라도 항상 쓴 것은 약으로, 단 것은 독이라는 개념이 인간을 지배하고 왔습니다. 쓴맛을 가진 약초는 강한 치료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쓴맛의 한약에 설탕이나 꿀을 넣는 것은 약효를 반감시킨다고 믿어 왔습니다.용담(Gentiana Scabra)라는 약초는 용 담낭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소태 같다는 것 이외에는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그래도 소화를 돕고 식욕을 잘 한다고 믿고 위장병 환자에게 흔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양에는 앙고스토라비타ー즈(Angosturabitters)으로 불리며 럼주에 쓰디쓴 약초를 섞어 만든 독한 술이 있습니다. 1824년 베네수엘라의 독립 투사 시몬, 볼리바르(Sim Bn Bolarvar)장군 휘하에 있던 한 군의가 만든 것으로 병사에 퍼진 만성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뛰어난 효과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쓴약이 몸에 좋다는 과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몸이 쓴맛을 지각하는 것은 무심코 독성 성분을 먹는 것을 막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적으로는 입에 달콤한 것은 안전하고 쓴 것은 위험합니다. 또한 장내에 쓴맛을 감지하는 수용체가 있는데 이들이 자극된다고 소화 흡수를 억제하는 장치를 작동하고 무엇이나 흡수를 차단한 상태에서 체외로 내려고 합니다.쓴 것이 식욕을 회복시킨다는 속설과 달리 쓴맛을 감지하는 혀의 감각 수용체가 자극되면 콜레스테롤 키닌(cholecystokin)이란 화학 물질이 분비되어 식욕을 떨어뜨립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쓴맛이 있는 약초는 오히려 식욕 억제제와 비만 치료제로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쓴약이 몸에 좋다는 속설이 얼마나 사람들의 뇌리에 내장되는지, 당 정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으로도 여겨집니다. 제약 회사는 달착지근한 성분으로 알약을 코팅하고 얼마든지 안 쓸게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아동, 고령자 등 특별한 환자군 때문에 제한적으로 사용될 뿐입니다. 요구르트나 사과 주스 등을 미리 한모금 마시고 약을 마시면 쓴맛을 훨씬 줄일 수 있지만 이렇게 마시면 약효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쓴약이 몸에 좋을 뿐 아니라 같은 약도 사용해야만 효과가 나올 거에요.과학자들은 이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냅니다. 전술한 콜레스테롤 키닌다는 생체 물질 때문에 같은 성분의 약도 쓴맛이 나온다고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최근은 일시적으로 쓴맛을 마비시키는 GIV3616이라는 화합물이 개발되기도 했는데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을 끈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화합물을 개발한 학자들은 말하는 것이 몸에 좋다는 뿌리 깊은 고정 관념에 대해서 별로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 같아요.몽테뉴(Michelde Montaigne)는 『 수상록 』에서 자신의 쾌락과 행운을 깎는에 교묘하게 기교를 부린 인간 심리를 꼬집었다. 쓴맛과 고난만이 인간에게 복을 가져오라는 자학적 심리는 종교적 관행과도 관련이 있습니다.중세에는 육체의 죄악을 정화하는 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채찍과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훼손하는 피를 보았습니다. 그보다 긴 원시 시대에는 사람을 산 채로 제물로 바쳐야 신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고 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고행을 거치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학대해야 복을 받고 질병에서 낫는다는 심리는 하나님에 대한 희생 제례와 속죄의 전통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고통을 통해서만보다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심리는 거의 모든 일상 생활에 침투하는 것 같아요. 맞으며 배우려고 기억에 오래 남아 딱딱하고 불편한 책상에서 공부하라고 성적이 더 올라갑니다. 한여름의 땡볕의 구보를 해야 체력이 더욱 향상시키고, 해병대에서 특별 극기 훈련을 받아야만 신입 사원의 사기가 높아집니다.사회의 어느 한쪽에서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연구하고 노력하는 반면 그 반대 측에서는 아무래도 쉬운 일도 어렵게 될지 고민합니다. 당신들은 힘들어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을 가진 부모들은 심지어 자신의 아이까지 사랑과 따스함을 표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고통을 통해서만 진정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며 쉬운 길도 어려워지게 우리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몽테뉴는 자신의 글을 다음의 일화로 마감합니다. 나도 그에 따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전쟁에 참패한 한 국가에서 잔인한 것으로 유명한 상대 왕에게 자비를 구하고 평화를 구하러 사신을 보냈습니다.전하, 여기에 노예 5명 및 분향, 깃털, 그리고 새와 과실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몸과 피를 먹고 사는 오만한 신이라면, 노예를 죽이고 그 고기를 드세요. 우리는 그만큼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당신이 호방한 하나님이라면, 분향과 깃털을 받고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사람이라면 여기에 가지고 온 새와 과일로 즐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