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6천리’ 燕行길, 의주와 베이징을 잇는 연행길 세 마디(三節), 초절(압록강~선양/10일), 중절(선양~산하이관/11일), 종절(산하이관~베이징/9일 소요)

[연합 이매진]”왕복 6천리”연기 행도 2018-08-08조선 실학자의 후손 23명이 다시 밟는다(서울=연합 뉴스)홍·독화 기자=”아 슬프다(슬픔)! 한나라 낙랑군이 있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평양인데도 한 시사군을 압록강 안으로 몰아넣다 조선의 영토가 줄어들었다.”연암 박·지원이 쓴 『 열하일기 』 제1권 도강록의 한 대목이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시대 군주였던 연암의 베이징 방문, 즉 제비행 길은 탄식과 통곡으로 시작했다. 연암은 44세 때인 1780년 6월 24일(음력)외교 사절단으로 청나라에 가8촌 형, 박 명원에 따라서 6개월(여행 3개월 체류 3개월)동안 연경을 오가는 6천리의 대장정에 나섰다.

[연합이매진]’왕복 6천리’ 연행길 2018-08-08 조선실학자 후손 23명 다시 밟는다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아, 슬프다(슬프다)! 한나라당 낙랑군이 있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평양인데도 한사군을 압록강 안으로 몰아넣으면서 조선 영토가 줄어들었다.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제1권 도강록의 한 구절이다. 조선 후기 북학파 영주였던 연암의 베이징 방문, 즉 연행의 길은 탄식과 통곡으로 시작되었다. 연암은 44세 때인 1780년 6월 24일(음력) 외교사절단으로 청나라로 향하는 8촌 형 박명원을 따라 6개월(여행 3개월, 체류 3개월) 동안 연경을 왕복하는 6천 리 대장정에 나섰다.

다음날, 압록강의 끊어진 다리로 이동하고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을 한바퀴 돌면서 북한 땅 가까이 접근했다. 유람선 안에서는 북한 화폐와 담배를 팔고 있었다. 위화도는 손짓하거나 이름을 부르면 보이고 들릴 정도로 가까이에 있다. 여기는 북-중 경제 협력의 상징으로 몇년 전에 열기가 올랐고 북한의 잇따른 핵 실험으로 중단된 두만강 유역 경제 벨트”창지투(창춘-지린-투먼)개방 선도구”프로젝트 현장인 황금평(전체 면적 14.4평방 킬로미터)이었다. 북은 오랜 퇴적으로 단둥과 접한 압록강 하류의 섬 황금평에 기업을 대대적으로 유치하는 대규모 경제 특구 개발 계획을 밝힌 데 이어 2011년 6월에 양국 고위층이 참여한 가운데 착공식을 가졌다. 위 성주와 단둥을 잇는 압록강 다리도 올라가고 봤지만 북한에서 나오는 화물 적재 차량이 끊임없이 오가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안개, 먼지, 바람 등”세 띠”를 경험한 연행 사절단

이저우와 북경을 연결하는 연 행도는 절면(압록강~선양/10일), 보통 마디(선양 상하이관/11일)마지막 마디(상하이관~베이징/9일 소요)의 3절로 구분한다. 답사단이 차에서 농촌의 신작로와 고속 도로를 쉬지 않고 달리고 따라갔다 첫 마디 구간을 조상들은 9박 10일에 주파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한여름의 땡볕과 장마, 돌풍 등 극도로 열악한 기상 조건에서 심한 행군하는 데 얼마나 힘들었나요라고 생각한다. 열하일기를 비롯한 연행 기록에 따르면 사절단은 낮에는 소나기와 장마, 땡볕 등의 “즐풍목 비”에 시달려야 했다.조상들의 연행 과정을 설명할 한중 연행 노정 답사 연구회의 신·충호 대표(문화 콘텐츠학 박사)에 일행의 누군가가 “멱살이라도 맘이 생겼지?”라고 물었다. 한다고 그는 노천탕이 있었지만”만족의 땅에서 몸을 씻지 못한다”라는 이유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연행자들은 또 밤이 되면 맹수들의 울음 소리와 말 또는 사람을 공격한 토라코 호랑이를 우려하고 편히 잠들지 못 했을 것이다. 중국 땅으로 들어서자마자 주룽청 인근 들녘에서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일으키는 추운 몸을 녹이던 사행단의 모습을 연행록은 “하나의 촌락을 이루는 듯했다”이라고 기술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의 위 주 군관들이 미리 설치한 천막에 세사가 벌어지면 마추이 같은 부하들은 철야 피리와 환호로 호랑이를 물리치면서 초야를 보내야 했다. 이처럼 중국 땅을 처음 밟은 조상들은 “새벽은 안개, 낮에는 먼지, 저녁은 바람”라는 3대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물 산성 마을 근처 문(책 문)과 펑청 시에 위치한 봉황 산지기 위아 몽제키를 마친 뒤 조선인의 후예들이 모이고 살겠다는 글 가보를 방문했다. 정묘, 병자호란 때 데려온 국경 지대의 조선인과 청나라 팔기군으로 망명한 통역사 등으로 활동한 문 씨 일가족의 후손들이 일시 집성촌을 이루는 정도 많았으나 지금은 다수가 대도시로 빠져나가고 7~8가구만 남았다. 그들은 200~300년간 한족 또는 만주족으로 살아 왔지만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에 신분을 바꾼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연행 길 3일 만에 방문한 회령과 키 요 이시타령(정 속료은, 고개)는 아직도 옛 길의 흔적이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특히 키 요 이시타령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봉림 대군(후에 효종)이 고개를 올라가며”음우 후 풍가”을 읊은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곳을 오가는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대한 울분으로 비분강 개의 심정을 표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연행 길에서 가장 높은 고개인 회령, 현재의 높령)와 가장 험한 파랑 이시 미네(정 속료은)을 지나야 요동에 이른다. 회령과 키 요 이시타령 고개는 지금도 히가시 하치 참 구간에서 가장 험한 산악 지역으로 꼽힌다.답사단 일행은 높령 아래의 관제 묘적로 키 요 이시타령을 바라보며 연암 선생님에게 바치는 고유제를 지냈다. 삭녕 최 씨 종가 중 회장의 최 성교(최·송교)씨가 제관을 맡아 선호, 이 이 마쿠 선생님의 후예인 이 오효은 씨가 축문을 낭독했다. 종손의 박·챠은그 씨가 준비한 제사 음식에서 실학자의 후손들이 처음 연행 길을 답사했다고 말했다. 킨토키업(김·시 오프)전 실학 박물관장(성균관대 명예 교수)는 “연암 사후 200년여 만에 실학자의 후손들이 그 뒤를 밟고 고유제로 보고할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사소한 일이지만, 크고 귀중한 것임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 1200리 요동원…’울 수 있는 곳’ 답사 사흘째 버스로 이동 중이던 일행의 눈길을 사로잡은 곳은 1200리에 달하는 요동들이었다. 연행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단둥에 도착한 뒤 천산만수의 험난한 노정을 마치며 만나게 되는 들판이다. 산기슭을 벗어나면 눈앞에 넓고 웅장한 광경이 펼쳐지는데, 그 길이가 경부고속도로 서울~부산 구간을 능가하는 470㎞에 이른다. 강우량이 부족한 척박한 땅이어서 옥수수를 심었지만 밭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연암은 220년 전 이곳을 지나면서 “한바탕 울 만한 자리 아니냐”(호경기장론)고 감흥을 표현했다고 동포가이드는 설명했다.

연암은 작은 땅 조선을 떠나고 새로운 세상을 만난 감동을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을 아이들이 내뿜는 눈물에 비유한 것이다. 요양에서 만난 요동 바이타도 “노부 행로 장관”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눈길을 끌었다. 연암도 “열하일기-요동 바이타기”에서 들판 한가운데 혼자 우뚝 솟아 있는 이 탑의 위용을 찬탄했다고 한다.연행이 18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과 사유의 영역이 확장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는 설명을 들으며”실학 조상들의 발자취를 어떤 마음의 자세로 쫓는 것?”라고 자문했다.조선 실학자들은 세상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실천적인 방안을 고민한 사람들이다. 고 나·송무 실학 패밀리 회장은 “새 실학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시대의 질타를 뿌리치려고 노력한 실학 조상들의 인생은 이번 연행 길 답사에 나온 후손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왕복 6천리 대장정” 연 행도 ” 연 행도는 한양에서 베이징까지 편도 3천리(1200km)을 넘는 먼 길이었다. 240년 전 조상들의 연행 길 전체의 노정을 보면 한양에서 의주까지 약 1천 50리, 의주에서 베이징까지 약 2천 61리로 미치아이 3천 111리이다. 가는 데만 꼬박 40일 정도 걸렸다고 한다. 베이징에서 40일 정도 머무르고 귀국하기까지의 여정은 왕복 6천리, 소요 기간은 4~6개월의 대장정이었다. 하루 이동 거리는 보통 50~80리(20~32km)에서 기상 조건 등에 의해서 차이가 났다. 김·김종호의 “대동 지지”에 따르면 중국에 길이인 한양에서 의식 주까지 약 41의 역참가 운영됐다. 양국 사신을 위한 쉼터와 숙박소로 모두 25의 저택도 설치했다.[사진/실학 박물관 안, 진희 연구원·실학 패밀리 제공]※연합 뉴스가 발행하는 월간”연합 이매진”2018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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